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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타로 아마노, “새로운 센세이션”, 2009 / 天野太郎 , "新たな情動", 2009
DATE : 08/23/2011 02:17

BOOMOON-PRESENCE, 조현갤러리, 2009

 

새로운 센세이션

 

19세기 초, 사진가인 엘리자베스 이스트레이크는 화창한 날에 사진을 찍으면 호랑가시 나무, 월계수, 아이비 그리고 상록 활엽수들이 햇볕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는 커녕 오히려 반짝이는 금속 파편이나, 눈발로 뒤덮인 것처럼 보인다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사진 발명 초기에 여러 사진가들은 전통적인 회화의 구성을 답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별도로 대상의 엄밀한 기록이 사진 본연의 목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대상을 기록함에 있어서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에 직면했었다. 은염 프린트 시대에서 디지털 이미지 시대로 완전히 이행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촬영 기술은 급속하게 진보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이스트레이크가 했던 고민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는 촬영 결과를 즉석에서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고 마음에 들 때까지 원하는 만큼 다시 찍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현상을 하지 않으면 찍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따르는 불안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오늘날 학문적 분야로서의 사진사(寫眞史)가 취급하는 사진은 처음 사진이 고안되었을 때의 그것이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품종이 개량되고 길들여진 가축으로서의 개가 원래 종자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로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게레오타입 시대의 사진과 디지털 사진은 현실을 포착한다는 외관상 유사성 외에는 전혀 다른 사진인 것이다. 우선 축적된 정보량에 큰 차이가 있다. 은염 사진을 아무리 확대한다 해도 보이지 않는 디테일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 반면에 카드만한 크기의 디지털 이미지를 실물 크기 이상으로 확대시켜 프린트할 경우, 보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확연히 드러나 놀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세밀하게 볼 수 없는 인간 시력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쿠르베가 그린 화가의 아뜰리에앞에 서있다고 가정해 보라. 아마도 이미지 전체를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될 것이다. 화집의 잘 인쇄된 사진 도판으로 이 걸작을 감상할 때는 구석구석을 분명하게 보았겠지만, 실제 그림 앞에서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우선 압도적인 크기의 캔버스 윗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 물리적으로 힘들고 실제 그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두워서 그림 속의 인물들을 일일이 알아 보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 사진이 실제로 거기 없는 것을 날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상이 무엇이든 훨씬 더 많은 디테일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아날로그 사진에는 없는 세계의 다른 양상을 제시한다.  

 

권부문의 작품은 이러한 디지털 사진의 정보량을 전적으로 살려서 세계를 보여준다. 평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방대한 시각 정보가 자연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 앞에 제시된 세계는 작가가 그 장소에서 보았던 것과도 다른 풍경인 것이다. 그의 풍경 사진 앞에서 관객은 첫눈에 고독”, “적막또는 풍요같은 단어가 상기시키는 이미지에 의해 감정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차츰 엄청난 양의 섬세한 디테일을 보게 되면서 처음 가졌던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인상을 날려 버리게 된다.

 

사진은 그 등장부터 세계를 있는 그대로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경탄하게 했으며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는 것은 사진에 부과된 주된 임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카메라가 찍어 낸 이미지는 찍은 사람이 예기치 못했던 결과를 보여준다. 현상액에 담근 인화지에 이미지가 나타나기 까지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이 반드시 따라다닌다. 필름을 사용하는 많은 사진가들은 여전히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권부문 사진의 힘은 다른 차원을 연다. 여기서는 드러난 현상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작가와 관객을 엄습한다.

 

어떤 사진이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만,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디지털 데이터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세계의 정보를 얻고 있다. 권부문은 이런 시대를 전제로 한 새로운 풍경을 추구하고 있으며 우리 안에 새로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다..  

 

타로 아마노 (요코하마 미술관 학예 주임)

 

 

* 피터 갈라시 인용, 사진 이전: 사진의 발명과 회화, p.29, 뉴욕현대미술관,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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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たな情動

19世紀初頭の
写真家エリザベスストレイク夫人は、快晴の日差しの中で写真を撮影すると「ヒイラギ、月桂樹、キズタその他の光のある葉をもった常樹は、陽の光の感をつたえず、錫粉をまぶしたか、さもなければ雪片をちりばめたかのような見え方になる」と不をもらす。写真が誕生したころ、多くの撮り手は統的な絵画の構を踏襲しようとしたが、一方で、記として正確をきすはずの写真を相手に、捉えたい象を均質に、あるいは、等にイメジとして定着させることに腐心するはめにることが意外にも多かった。無論、銀塩のプリントの時代から、デジタル像の時代に完全に移行したかのような況をしめしている中、写真の撮影技術は急速な進を重ね、今では、イストレイク夫人の不は解消されている。デジタル像の時代では際に現像してみなければ像の有りが予測出ない、という不安は拭され、撮影をしたイメジは、即座にカメラのモニタで確認が出、納得いくイメジを撮るまで何度でも撮影することが可能になった。
ところで、
問分野(discipline)としての写真史が扱う「写真」は、草創期と現代では、その意味で、まるで、繰り返し品種改良された家畜としての犬のように、もはや原種とは似ても似つかないような「進化」を遂げさせられてしまった。つまり、ダゲレオタイプの時代の写真とデジタル時代の写真は、「現し取る」という佇まいの近似性以外は、異種の写真になってしまった。何よりも、その情報量。銀塩による写真をデジタル化したとしても、イメジを張するに伴って、不可視の象が可視化されることはない。ところが、デジタル写真においては、全くそれとは逆の事態が起こる。手元で見られるようなサイズに印字されたプリントでは判然としなかったものが、大容量であるという前提に、等身大以上にプリントされたとき、者は、隅まで鮮やかに再現される眼前の事態に驚異することになる。文字通りは、われわれは、肉眼では、世界について何も見ることが出ないことを思い知らされる。
際のところ、オルセ美術館のクルベの「家のアトリエ」の前に立つと、一向に描かれたイメジの判が進まないことを思い知らされる。分割された部分を集の写真図版で「鑑賞」していたときの了解は、ここでは、まずは、物理的に視の範疇外、例えば面上部の鑑賞が成り立たないことづくだろうし、そもそもあれほど描かれた象が鮮やかに浮かび上がっていた集のイメジの明るさは、ここにはなく、暗闇の中で目を凝らさないと何も見えないことを思い知る。
デジタル
写真は、無論、この世にないものまで捏造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もともとある自然の情報をより克明に暴きだしているにすぎない。とは言え、これは、繰り返しになるが、アナログ写真とは、別の世界の相を我に提示する。

Boomoonの作品は、まさにこうしたデジタル写真の情報量を十全に活かしながら、世界を示す。いや、そもそも肉眼を通して得られない自然の膨大な情報の存在を我は普段付くことがない以上、示された世界はまさにカメラが撮った目の前にあるものとは別の風景であるのだ。
さてここでは、一瞥して「孤
」、「寂寥」、「豊」といった言葉を想起するイメジによって、者は、感情のれを自するものの、やがて面隅から飛びんでくる風景の「詳細」が、初見時のクリシェな印象を吹き飛ばしてしまうことになる。写真は、その登場から、世界を「ありのまま」に提示することで人を驚嘆させ、爾、「ありのまま」を示すことへの要請がその主な使命ともなった。とは言え、際のところ、カメラがし取る象は、少なからず撮り手の予想を裏切ることになる。現像液につけて、やがて像が現れるまで、撮り手ですら予測不能な部分が必ず付きまとう。それがまた撮り手にとってきない魅力にもなっているのだが、ここでは、その次元とは異なる、倒的な事象の存在感が撮り手も者を襲うことになる。
確かに、された写真が、デジタルで撮られたのか、アナログで撮られたのか、判別することは不可能だろう。とは言え、デジタルのデタを通して、我、世界の情報を知りつつある。それを前提とした新たな「風景」が、ここで示されようとしている。

天野太郎 (浜美術主席芸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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