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TEXT - б
TITLE : 김승현, “불쾌한 사진”, 1997
DATE : 08/22/2011 22:56

 1997 전갤러리 권부문 근작전 서문

 

불쾌한 사진

 

바다에서 담아왔다는 시퀀스를 보았다. ‘바다 사진, 저 바다 사진’ 하면서 권부문과 사진을 이야기했다. 무릇 하나의 범주로 깨끗이 몰아넣어야 성에 차는 인지상정의 성급한 질문을 불쑥 꺼낼 때마다 그는 오히려 질문의 근본을 의심하였다. 결국 나는 그가 일정한 이론의 천착이나 사진이 던져온 오랜 화두에는 관심이 없는 분방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거듭 확인하며 계단을 내려와야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선상(船上)에 서 있는 그를 떠올려본다. 물과 빛과 대기에 둘러싸인 그다. 바다라는 말은 다분히 시각(視覺)의 자궁에서 태어난 명사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황토 한 줌으로 대륙을 떠올릴 수 없는데, 한 동이의 물로 바다를 떠올릴 수 있을까. 동이로 길어 올릴 때 이미 그것은 바다로부터 떠난다. 더구나 발을 담그고, 맛을 보고, 냄새를 맡아서 느끼는 바다는 한 동이의 바닷물과 다르지 않은, 마시지 못할 소금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바다는 시각을 골간으로 하는 오감의 도움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지각할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다가 소금물의 단순한 집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해초도 물고기도 필요 없이 몇 가지 성분의 구성으로 바다를 상정하는 것이 경화된 학문이 범하는 오류의 일례라면, 그러한 학문은 바다의 동맥을 자르는 잘 드는 칼이다. 호화스러운 물비늘을 만드는 태양광이나, 일찍이 권부문을 가르고 지나갔던 대기(大氣)마저도 그런 지식의 칼은 숨을 끊고 말 것이다.

이물에 서서 물과 빛과 대기를 만끽하는 그의 태도는 과학과 철학의 무장을 해제한 벌거숭이의 호흡이다. 그와 인사를 나눈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창 너머로 ‘바다’가 지나가는 낯선 광경을 본다. 그의 사진 속에서 번들거리던 바다는 나에게 배의 용골이 되라 이른다. 이제 새로운 척추와 눈을 달고 도심을 미끄러진다. 거리의 인파와 사물들이 낯선 얼굴로 지나간다.

어디에나 권부문의 ‘바다’는 있다. 우리가 무거운 인식론의 무장을 풀어놓을 때, 그 바다 역시 거짓 없는 나신(裸身)으로 우리 앞에 돌출한다. 권부문의 사진은 그와 풍경이 나신으로 마주하면서 느낀 생경과 당혹의 적자(嫡子)이다.

어릴 적의 일이다. 집안의 행사로 외가(外家)에 가야 했다. 방금 씻은 얼굴로 마루턱에 앉아 단장을 하고 있던 할머니는 동그랗게 굽은 등으로 딸의 일가를 반겨주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지만 마중하는 할머니의 어깨 뒤에 늘어진 곱슬곱슬한 머리칼은 뜻밖이었다. 비녀가 없는 할머니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적잖은 놀라움이었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비녀는 그의 눈썹이 눈 위에 자라 있듯이 머리 뒤에 있어야 하는 신체의 일부였다. 서둘러 몸단장을 마친 할머니는 관념 속의 할머니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할머니가 ‘들켜버린’ 풍경 때문에 나의 기분은 유쾌할 수 없었다.

권부문의 사진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비녀를 뽑은 내 할머니의 모습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 풍경의 비녀마저도 뽑아놓는다. 그는 내 불쾌한 유년의 기억과 유사한 체험들을, 피아간(彼我間)에 벌어지는 일종의 ‘진동’으로 파악하는 듯했다. 그 진동은 그가 사진을 찍게끔 하는 동기이자 그의 사진을 생경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셔터만 누르면 나올 법한 사진이 그를 작가로 만들어주는 까닭은, 요컨대 거리나 바다를 구경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잘 훈련받은 우리의 시각을 벗어나 순간순간 벌어지는 풍경과의 대결국면을 겪게 하기 때문이다.

 

김승현(서남미술전시관 큐레이터)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