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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쿠라이시 시노, 쿠라이시 시노, "거울, 창, 성좌 - 권부문의 예술", 2013
DATE : 02/24/2014 17:02

<권부문, 성좌>, 대구미술관, 2013

 

거울, 창, 성좌 - 권부문의 예술

 

 

쿠라이시 시노 (평론가, 일본 메이지 대학 사진사 교수)

 

 

 

1.

그림을 보는 것, 사진을 보는 것, 본래 그 자체는 매우 단순한 행위이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으면 그만이고, 잠자코 발길을 돌려 전시장을 뒤로 하면 그만이다. 물론 계속해 보고 싶다면 적어도 전시실이 닫힐 때까지 거기 그대로 있으면 된다.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콘서트에서 음악을 듣는 행위는, 이렇게 그 자리를 떠날 자유, 머물 자유가 약간은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미술작품을 상대하는 경험이 너무나 간명한 것은, 작품에 관계하는 만드는 자와 감상하는 자, 그리고 매개자에 따라 오히려 난제로 여겨져왔다. 즉, 작가, 감상자, 큐레이터, 비평가들과 같은 미술환경을 형성하는 관계자에게 있어, 그런 간명함은 불식해야할 저주와도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며, 그 간명함을 어떻게 복잡한 것으로 보이게 할지, 그 기술을 겨루기에 안성맞춤인 아레나가 이 시대의 미술관, 화랑, 아트마켓과 같은 제도적 공간이다. 예를 들어 미디어 아트의 주류에서는 오랜 동안 소위 인터렉티브한 관객의 능동적인 참여가 예술의 새로운 부가가치라는 이론 아래 어줍잖은 속임수의 간계와 질리도록 직면해 왔다. 다양한 센서며 입력디바이스가 작품 속에 내장되어 그것을 컴퓨터로 제어해, 관람자의 작은 움직임이나 조작이 작품에 가변성을 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치도 결국은 작가의 사전 설계범위를 벗어날 여지라곤 없으며, 그러기에 더욱 작품을 만드는 자들의 권력기반을 강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계성이 있는 항목으로 간주하면서 작가와 관객의 권력구조가 대등하다는 환상을 뿌려대는 예술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기개를 파기한 채, 관객들에게 그 권력의 겉껍데기만을 이양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잘 하면 어디까지나 작가에게 이득이 되며, 미적지근한 반응만이 돌아올지라도 그럴수록 모든 것은 관객 스스로 발견하는 몫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니까, 작가에게는 애초부터 면책특권이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관객참여 형태의 볼거리 예술이란 최악의 경우 작품과 마주할 때 내재할 법한 침묵하는 소통의 깊이를 쉽사리 포기해 예술이 지닌 소통가능성 자체를 단절해버리는 것이다. 권부문의 극도로 단순한 작품형식은, 전시의 근원적인 간명함,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여야 할 현상에 쓸데없는 옷을 입히는 시장경제 중심주의적인 현대미술의 우울한 습관에 조용히 경종을 울려왔다.작품과의 대화를 권하면서 관객에게 진지하게 다가가는 점에서는 그의 작품만큼 관객참여적인 작품은 드물 것이다. 나는 권부문의 사진이 포착한 바다의 파도, 하늘, 산봉우리들, 얼음덩어리 앞에 서는 것을 거울 앞에 서는 경험에 비유한 적이 있다. 1 특히 하늘시리즈「구름 위에서」나 2010년의 겨울바다 연작「낙산」은,신체의 윤곽 정도의 크기로,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 위치를 치밀하게 계산한 배치로 내면성찰의 경험을 주는 장이었다. 나는 권부문이 찍은 풍경 앞에서 언제나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의식하게 된 게 있다. 그의 작품 앞에 서는 것은 심문석에 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서서 그 순간 중요한 증언요청을 받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재판의 참고인으로서의 의견청취가 아니라 명백하게 판명된 사안의 당사자로서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그 판결의 장에서의 진술에 걸맞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증언할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행사해야 하는 중요한 장소가 다름아닌 작품과 대면하는 거기인 것이다.그럼 나는 무엇을 증언하기 위해 그 장소에 소환되었을까. 아마도 너무나도 오래전부터 받아온 질문인 예술의 주제, 다름아닌 자연에 대해서가 아닐까. 이 자연 속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예술의 바깥에 펼쳐지는 현실사회의 연속인 주제도 들어간다. 권부문의 작품 앞, 그 대면의 위치에서, 나는 단지 내면의 성찰만이 아니라 작품을 관통하면서 제시되는 바깥 세계와 조우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미 사진의 오랜 비유인 ‘거울’과 ‘창’이, 그 낡은 개념 형식의 먼지와 손때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2.

1999년, 나자렐리 출판사에서 나온 사진집 「부문」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1990년대의 작가의 자연 작업에서 일어난 변화가 각인되어 있다. 첫 파트에는 자연과 인위가 혼재된 다양한 풍경이 담겨있다. 시사비평적인 서술체의 작업은 그 다음 부분에서 두 개의 탁월한 주제로 이어진다. 두 번째 파트에 실린 동지나해 풍경과 1997년 같은 해에 제작된 세 번째 파트에 실린 하늘 사진 연작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는 명확한 단절이 있다. 1990년대 후반에 확신을 지니고 기획한 듯한 이 단절은, 단순히 작가의 개인사적인 주제선택에 대한 결의표명,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거기에는 당대가 풍경이론에 만연한 사고판단의 보류와 단호하게 결별하는 몸짓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동아시아의 여러 도시에도 후기산업사회로의 이행이 확대되어, 고도자본주의 사회적 도시의 현실이 가상 정보공간에 한층 더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막상 현실공간에는 활기없고 애매한, 사용가치를 잃은 ‘테렝바그 terrain vague’가
제멋대로 방치되었다.2 불어로 ‘테렝바그’라 불리는 이런 장소는 유럽과 북미에서 시작해서 동아시아로 확산되었다.
‘도시화’라는 용어만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산발적인 방식으로 특히 도시주변부에 널려있는 자연과 인위의 공간, 그리고 그 중간지대를 침식해 갔다. ‘테렝바그’야말로 역설적으로 도시의 현대성, 특별히 부정적인 현실의 표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연과 인위의 중간영역에서, 환경론적 의미에서 수습불가능한 부정적 성격과 함께, 말하자면 부정신학(否定神学)에서처럼 미와 숭고의 기적적인 현존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1990년대에도 여전히 우세했던 사진가들의 풍경 접근 방식은, 워커 에반스가『미국의 사진 American Photographs』(1938) 에서 추구한 대공황 이후 미국동부의 중소도시 및 최남부 농촌의 피폐한 풍경에 대한 진지하고 명징한 작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에반스의 사진에 나타나는 청교도적 성향의 고전적 모더니즘/형식주의는 여러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1980년대 로버트 아담스, 레위스 발츠, 리차드 미즈락과 같은 사진가들의 후기산업산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어나오는 ‘아름다움’이 어긋나게 공존하는 풍경에서 마지막 빛을 발했다.
1999년의 나자렐리 출판 사진집 「부문」의 첫 파트, 특히 1990년대 초반까지 제작된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권부문도 역시 ‘테렝바그’와 무관하지 않은 공터, 즉 자연과 인위의 중간 장소에 미적인 무엇인가의 드문 현현(顯現)을 있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 태도는 사진적 모더니즘의 최고의 성과를 계승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장소는 풍경의 현재진행형을 포착하기에 열심이었던 사진가들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의 장, 자연 이미지의 제로 지점이었다. 1990년대는 또한 동아시아의 농촌에서 이미 사라져가는 전통과 풍습이 보다 광범위한 도시화의 흐름에 씻겨졌던 시기와도 겹친다. 이미 1975년에서 1980년에 걸친 시기에 권부문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전통가옥과 풍경을 단호하고 치밀하게 기록했다. 여기서 작가는 농촌의 촌락공동체에 대한 만가(挽歌)를 읊었던 것으로, 이는 상당히 선구적인 위기의식을 지난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권부문은 공터를 주시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풍경론의 시점에서 고찰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풍경 표현의 전형적인 시각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작업에도 집착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중반, 권부문이「구름 위에서」연작과 일련의 바다 작업을 할 때 그 실험적 풍경 이미지는 확실히 당시의 사진계에서 돌발적이고 예외적으로 보였다.「구름 위에서」와 바다 연작의 끝없이 간결한 서술과 묘사와 같은 부류는 그 당시로 상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들에는 1910년대 중반에 검은 사각형의 회화에 도달한 말레비치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표현 요소의 무차별적 단순화와 그 근거가 된 ‘비형상성’과 ‘비대상성’의 추상 개념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3 ‘수프레마티즘’회화를 하면서 말레비치는 모든 형태를 정사각형으로 환원한 후에 새로운 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즉 사각형은 도래할 세계를 구축하는 기본 형태이자 새로운 묘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창이라고 여긴 것이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에 필적하는 엄격한 도형이 이 시기 권부문의 사진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를 매개로 세계와 지표적(index)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기록과 복사를 벗어날 수 없는 사진은, 큐비즘에서 시작된 표상공간의 점차적 해체 과정의 귀결이었던 추상회화의 과제를 그대로 계승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를 통해 권부문의 사진 작업은 거의 끝나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풍경 사진의 맥락에서 사진적 단순화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였다.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이자 ‘다수’로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과 바다를 상하로 선명하게 분할하는 수평선이라는 구성요소야말로 그 이후의 권부문의 작품이 지닌 풍요로움을 보증하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3.
권부문의 자연 접근에서 북방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글자 그대로 나타난 작업은 북극권의 동토 및 얼음이 흩어진 바다와 그 해변에서 작업한「북풍경」이다. 그 중에서 뾰족한 얼음들의 모습이 두드러지는 몇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의「얼음바다」(1823-24)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작품에 대해 미국의 미술사가 로버트 로젠블럼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작품의 옛 제목은 ‘희망호’의 조난을 그린, 지금은 소실되어 버린 그림과 같은 작품으로 오인되어 붙여졌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을 감안하더라   도  ê±°ê¸°ì—ëŠ” 지금도 인정할만한 시적

       진실이 있다. 즉 자연의 영원한 전능의 힘, ê·¸ 빈번한 파괴적 힘에 저항하려는 인간의 순간적 야망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4

산산조각난 선체의 파편을 빙산이 삼키는 이미지는 북구 낭만주의의 자연과 인위의 격투와 그 격투에서 반드시 패하는 위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본래 북극해라는 장소의 극한성과 가혹한 환경 자체가 낭만주의적 예술의 조건을 작가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의 회화는 항상 화면 속에 작은 인물을 거대하고 성난 자연과 대비시켜, 숭고한 자연에 맞서는 힘없고 왜소한 인간의 끊임없는 좌절과 재도전을 되풀이하는 운명을 암시한다. 프리드리히뿐 아니라 낭만주의 예술가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파토스에 의지해, 자연에 대한 자신의 좌절을 부단히 받아들이고 다시금 자연과 맞서고자 한다. 그리고 그 불굴의 욕망이야말로 회화를 영웅적 비극의 무대로 만들었다.그에 대해 권부문의「북풍경」에는 인위의 흔적이 없는 청정함이 결정화되어 있다. 그 밖에도 권부문이 의도적으로 인위적인 요소가 없는 순수한 자연, 또는 극지의 풍경에 과감하게 맞서가는 것은, 이 청징함과 결정성(結晶性)이라는 풍경의 질을 포착하기 위해서이다.

20세기초기의 이십년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추상 충동의 주요 모티프의 하나는 낭만주의적인 즉 개별과 특수성에 유래하는 비극의 초월이며, 보편성의 획득이었다. 더 나아가 거의가 신비주의자들인 추상회화의 창시자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라는 19세기를 통한 담론의 이중의 제도적 구속을 벗어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회화가 나누어 지니고 있었을 이와 같은 19세기적 담론을 20세기후반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으로 계승해 온 것은 사진이라는 장르였다. 권부문은 회화에서 사진으로 이양된 담론의 구속을 풀기 위해 다시금 자연 자체와 대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기 위해 우선 하늘과 바다라는 가장 간명하고 무한대로 열려있는 극단적인 모티프에 도달한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바다의 사진을 찍는 권부문에게 낭만주의적인 비극의 재연은 염두에 없었고, 그 결과 그의 사진은 비극의 초극을 꾀한 추상회화와 유사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권부문의 작업은 초기 추상화가들이 의거한 신비주의적 정신성이나 불가지론적인 단언과는 무관하다. 어디까지나 간결하고 누구의 눈에도 자명한 고요하고 안정된 이미지로 제시될 뿐이다.

최근의 권부문의 연작「돌에게」(2005-07)에서 풍경의 중심에 신중하게 놓인 거대한 돌과 2008년부터 시작한 「산수」에서 특히 화면 중앙의 나무들은 물질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환기시키며, 동시에 의인적인 대상물에 견줄 수도 있을 듯해 흥미롭다. 낭만주의적 존재 양식에 부합하는 제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황량한 풍설과 넘실거리는 파도가 어우러지는 광경을 찍은 걸작「낙산」연작, 청명한 밤하늘을 수놓으면서 차갑게 흩어져 있는 성좌를 찍은「별보기」도, 화면에 등장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연 앞에 선 주체의 존재를 강렬하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과거 낭만주의의 자연 = 인간 관계의 자리매김을 재고하고 참조하게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권부문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자연의 변경에 서서 자연과 대립하며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사는 근대주의적 주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권부문의 풍경사진에서 화면 속에 등장하지 않는 주체의 위치가 엄연히 상정되어 있다. 그 위치는 바로 자연 앞에 선 촬영자의 위치이며 그것은 또한 사진을 보는 감상자인 우리의 위치이기도 하다. 단지, 불가시의 위치에 있는 우리, 즉 촬영자, 감상자, 그리고 만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체는 사진 속에 비친 나무가지, 돌 하나, 바람 속의 눈송이, 흩어지는 파도의 물거품, 밤하늘의 별보다 월등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체는 자연의 무수한 부분과 평등하게, 자연 ‘속에’있다. 우리의 몸둘 곳이 달리 있을 수 없다. 권부문의 사진에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연의 사물 속에 인간도 또한 흩어져 존재한다. 사물의 흩어짐을 아우르는 이념을 발터 벤야민은「성좌」라고 부른다.5

“보편적인 것을 평균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본말전도이다. 사고야말로 보편적인 것이다. 한편 경험적인 것은 그것이 극단적일수록 더 정확하게 인식되고,그만큼 심오한 핵심에 접근하는 것이 된다. 개념은 이 극단적인 것에 서 유래한다…각각의 사고는 그 주위에 극단적인 것이 모일 때 비로소 명확한 윤곽을 드러낸다”6

여기에는 권부문의 개성적인 예술을 큰 틀의 시각에서 이해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서가 쓰여있는 것 같다. 각각의 연작은 모두 다 벤야민이 “극단적인 것”이라고 부른 경험적인‘지知’로 충만한 살아있는 작품이다. 권부문이 경탄할만한 해상도로 세상 끝의 절벽이나 구석을 응시하고 음미해 채집한 자연의 사물= ‘별’을 조합해 만들어내는 사진의 성좌는 곧 이상적인 정신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상과 등가로 존재하는 이미지와 그 배열로 결실에 이르른 것이다. 이상적인 정신, 즉 벤야민에 의하면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는 사물의 개별적이고 평등한 현전 (現前) 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다. 아무도 “성좌 = 사고”의 빛을 믿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인 이 시대에, 권부문의 사진은 자연과의 충실한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성진(星辰)을 잇는 몸짓과 예지를 지극한 고요 속에서 되찾으려는 목소리인 것이다.

 

 

1. 쿠라이시 시노, “눈, 바다, 빛”, 권부문 작품집 『낙산』, 나자렐리 프레스, 포트랜드, 2010 (한글번역 : 오소자, 『권부문 -산수와 낙산』, 학고재, 서울, 2011)

2. “테렝바그 Terrain Vague”에 대해서는 이하 참조. Ignasi de Sola-Morales, “Terrain Vague” in Dean Aimy(ed.), Center Volume 14 : On Landscape Urbanism, pp.108-121, 2007

3. 말레비치의 회화개념에 대해서는 이하 참조.K.S. Melevich, Essay on Art 1914-1933, Vol.1 & 2, edited by Troels Andersen, Rapp & Whiting, London, 1968

4. 로버트 로젠블럼, 『현대회화와 북구 낭만주의의 전통 - 프리드리히에서 로드코까지』, p.34, Harper & Row, 뉴욕, 1975 (한글번역 : 박영란, 현대미술사학회, 1995)

5. 발터 벤야민, 『독일비애극의 원천』, 1924 (영문 번역 : John Osborne, Verso, London and New York, 1998)

6.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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