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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변수정, 작가와의 대화, 2013
DATE : 02/24/2014 16:22

<권부문, 성좌>, 대구미술관, 2013


본 텍스트는 대구미술관이 2013년 기획전으로 마련한 권부문 <성좌>전의 준비과정에서 작가와 큐레아터가 이메일을 통하여 주고받은 대화를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 권부문(權富問), 영문으로는 부문(BOOMOON)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부할 물을 , 성까지 합치면 권력과 부에 대해 묻는다는 의미의 철학적인 이름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작명이 중요한데 내 경우 이름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세상과 인생에 대해 많은 질문들을 품고 사는 것 같다.

영문 표기에서 성 없이 “부문”이라고 한 것은 작업을 통하여 만난 외국 친구들이 사회인 “권부문”이 아니라 작가 “부문”으로 나를 부를 때, 원점에서 세웠던 의지를 일깨우고 확인하게 해주는 면이 있었다. 1999년 미국에서 출간된 <부문 Boo Moon>이라는 첫 모노그래피는 나의 삶과 작업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과의 접점에서 새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성을 안 쓴 것은 가족이라는 인습,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뜻도 있다. 세상의 무엇에도 억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은 내게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의 화두였으며, 20대의 나에게 유산처럼 남겨진 삶의 기준이었다.

 

- 왜 사진인가? 사진을 선택한 이유와, 작가로서의 시작이 궁금하다.


어린 시절에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TV가 없던 시절이니 거의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현실 넘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수단이 영화였고, 또 라이프 Life, 루크 Look 같은 잡지였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영화는 나에게 너무나 먼 매체였다. 어려서부터 늘 그림을 그렸고 미술반 활동도 했다. 16세 때 아버지가 쓰시던 자이스이콘 이코플렉스 (Zeiss Ikon Ikoflex) 카메라를 물려받아 첫 사진을 찍었다. 어처구니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상과 인화를 혼자 터득했지만 그림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즉각성에 매료되었다. 이미지를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열망의 힘으로 사진가가 되었지만, 그것은 우리 시대의 공통된 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말하듯이 사진을 찍는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했으니까. 사진은 내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시약, 명약 역할을 했고, 현재에도 계속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했으나 실망이 컸다. 그래서 학교보다는 거리에서 사회적 풍경에 탐닉했다. 그 덕분에 18-19세 때 작품이 남게 되었다. 도시의 풍경을 통해 의식을 확장시켜 나간 결과물이 1975년 봄 서울과 대구에서 개최한 <포토 포엠>이라는 첫 개인전이었다. 1970년대 초 서울, 부산, 대구 등 근대화의 열기가 가득하지만 한편 무겁게 억압된 분위기를 표현한 이미지들이었다. 당시에는 소위 '리얼리즘' 사진과 '살롱' 사진이 지배적이었는데 <포토 포엠>은 그러한 사진을 거부하는 선언적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이 담론화되기는 요원했다.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하는 사진 환경에 실망하여 그간 작업을 정리하며 다른 표현 매체를 찾으려고 연 전시였는데 막상 거센 비난에 마주치자 사진을 더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여기까지 왔다.

 

대구 1973



- 1980년대 말부터 인간 없는 광활한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하였다. 풍경 사진이 주를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나는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인간 사회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면서 자연 앞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 인간의, 작가의 의식화된 개입이 사회를 향상하고 발전시킨다면 왜 이렇게 인간사가 나날이 나빠지고 있겠는가? 다 착각이고 아전인수라고 생각한다. 풍경은 바람 속의 구름 같은 것으로 나의 마음 상태와 해석력에 따라서 드러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풍경 이미지는 내 앞에 드러나는 세계와 교류하는 프로세스이고 나를 고양시킨다.  내 작품에서 인간의 자리는 이미지 속이 아니라 내가 카메라와 함께 섰던 자리, 이미지 앞이다.


- 현대 풍경사진은 문화적, 사회적 풍경 사진이 주를 이룬다. 당신의 풍경은 이러한 시류와 다른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근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 같다. 실제로, 무거운 장비를 메고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는 모습은 마치 오랜 진리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은 나에게 거리두기를 가르쳐 주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본질에 다가서는 방법이 거리두기다. 사진에서는 대상이 원하는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자리를 파악하고 뻔한 것이나 현혹시키는 것으로부터도 거리두는 힘이 요구된다. 사진 이미지를 다루는 자는 익숙한 것을 인식의 힘으로 낯설게 해서 사물이 새롭게 발언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회적인 제스츄어가 아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경향'이란 담론이 만들어 낸 것인데, 정보유통의 속도가 극에 달한 오늘날에는 오직 새로움의 반복 재생산이 되어버렸다. 작품이 온갖 예술 카니발과 각종 담론에 유용하게 쓰여질지라도 작가가 부화뇌동하지 않는한 작업은 경향과는 무관하다고 믿는다. 빛나는 어휘도 세간에서 닳으면 그 단어를 쓰는 스스로가 민망하고, 감동뿐 아니라 의지조차도 사라진다.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개념과 의미를 쏟아 넣으면 이미지는 긴 세월 속에서 자생할 수 없어진다. 오늘날 사진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내가 선택한 사진에는 오롯이 대상 앞에 서는 희열이 있다. 현실을 떠난 구도는 내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여행은 내 삶의 접점을 넓혀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 이번 전시는 199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진행해온 8개의 연작들이 선보인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의 이미지들이 대구미술관의 8개 전시실에서 상호적 관계를 이루며 설치된다. 어떻게 전시를 구상하였나?


이번 전시는 20여 년에 걸친 구상을 실제 공간에서 펼쳐보는 기회가 되었다. 1989년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사이즈였던 124x180cmC-Print를 서울 인공화랑에서 전시하며 재현 이미지로서 사진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실험해 보았으나 2006년이 되어서야 대형 사진 이미지를 제작하고 전시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졌다. 대형 사진에서 이미지는 텍스트가 아니라 현상으로 제시되고 그 앞에 서는 경험조차 재현해낸다. 1997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생루이 예배당의 전시에서는 전시 장소의 건축적 공간과 사진 이미지가 만나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것을 경험하고 이미지의 방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미지의 방들은 실재하는 장소의 경험들이 모여 만든 새로운 공간이며, 그런 방들이 모여 또 하나의 장소와 시간을 만든다는 생각에서 이번 전시에 '성좌'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미지의 방에서는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사진적 호흡과는 다른 상황들이 만들어진다. 전시를 한다는 것은 그런 미지의 장소에 대한 추구이다.


 <태도들>, 파리 쌀페트리에르 쌩루이 예배당, 1997

 

- 다양한 연작들은 일관된 태도에 근거하면서도 미묘한 기술적, 미학적 차이들을 보인다. 작업을 통해 의도한 것과 의도치 않았음에도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나의 작업은 미리 정해놓은 컨셉이나 아이디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 자체는 나에게 일어난 난 일이다. 작가라는 필터를 통해 이미지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데 부름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돌에게>시리즈 조차도 아이템 컬렉션을 수행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마주친, 풍경 속에서 외면할 수 없는 존재와의 사진적 대면이 모여 하나의 시리즈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지가 사진 작품이 되는 과정에선 용의주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에는 셀렉션이 현장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의도가 생기거나, 개념이 개입한다.

 

- 연작들은 전체적으로 정적이며 구도적이다. <산수>, <낙산>, <병산>은 색채 또한 거의 무채색으로 더욱 그러한 느낌을 준다. 반면 <숲에서> <북풍경>은 원색적인 컬러와 톤은 화사하며 거의 전면적 올오버 구도로써 보다 더 물질적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작업이 정적이거나 구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낙산>에는 바람과 파도의 소리가 거칠고 화면을 뒤덮는 거센 눈발이 있다. 색은 빛에 의해 드러난 현상이다. 설경에서 흑백을 택한 경우는 색온도의 얼룩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숲에서> 시리즈는 숲에 보낸 시간의 결과물로 강렬한 녹색 체험이 올오버 화면을 선택하게 했다. 일반적으로 숲을 다루는 사진은 숲의 감성을 특정화 하거나, 숲의 다양한 유형을 제시하는 반면, <숲에서>는 혼돈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는 작업이다. 나는 방향을 잃게 하는 미로같은 무성한 숲을 좋아한다. 혼돈이 클수록 그 속에서 발견하는 조화의 의미도 값지기 때문이다.

<북풍경>은 말과 의미가 무색해지는 풍경을 찾아 간 작업이다. 극지방의 빙원에서는 공간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데 익숙한 기준과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그곳에서는 일상의 스케일이 사라지는 절대 지평의 환상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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