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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시노 쿠라이시, "눈, 바다, 빛", 2010 / 倉石信乃, "雪、海、光", 2010
DATE : 08/23/2011 02:50

, 나즈라엘리 프레스, 미국 2010/ <권부문_산수와 낙산>, 학고재 갤러리, 서울, 2011

 

, 바다,

1

예전에, ()에는 현성’(現成)이라는 말이 있었다. 눈 앞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 또는 가공되지 않은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을 말한다.  사진 장치는 원래 허식없는 무구(無垢)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 ‘현성이라는 궁극의 이상을 재현하는 데 적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사진이 해온 것은 단순히 외관이나 가짜 현성을 을 만들었을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전례를 거듭하면서 있는 그대로그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허구의 영역에 안주하였다. 애초에 사진은 그야말로 빛의 은총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빛의 낭비에 빠져있다. 사진의 발명자 중 어느 누구는 사진을 빛의 언어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을 빛에 의하여 사물의 흔적이 정착되는 신비와 경외심을 야기하는 방법에 대한 적절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오늘날 빛의 언어는 광고 효과를 위한 시각적 패턴, 다루기 쉽고 무의미한 의태어로 전락하였다.

 

사진이 있기 오래 전, 인간이 태양을 숭배하고 불을 경배하던 시절부터, 빛은 진리와 선()의 비유로 사용되어 왔다. 사람이나 사물에 빛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빛이 사라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한편, 빛의 은유가 상투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둠의 깊이가 중요해졌고, 밝기 혹은 어둠의 단계가 과거의 은유를 풍부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비유도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고, 빛도 어둠도 예전에 그러했던 자신의 패러디로서, 진리와 선( )의 빈 껍질을 말하는 노스탤지어를 담은 기표일 따름이다. .  

 

사진은 지금도 빛의 언어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빛에 의한 사물의 흔적일 수 있는가. 매체로서의 사진은 전적으로 물리적이며, 사물을 보는 행위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명제를 증명한다. 사진은 표면의 반사를 재현할 따름이다. 사진 안에 빛나는 것은 찍힌 사물의 빛이 아니다. 어디로부터 받은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 그것은 철저히 표면적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말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일본의 선승 도원(道元)의 말이 마음을 울린다 

 

 밝고 밝은 광명이 삼라만상에 있다. 삼라만상의 광명은 모든 수목, 뿌리와 가지와 잎뿐 아니라, 꽃과 열매의 광명이다. 지옥도 (地獄道), 아귀도 (餓鬼道), 축생도 (畜生道), 인간도 (人間道), 천신도(天神)에 광명이 있고, 수라도(修羅道) 에 광명이 있다1 

 

때때로 자연을 찍은 사진의 색 뒤에는 불가시의 빛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사진에 찍힐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단절이 없다. 도원대사가 말하는 광명은 명증성(明証性)의 대립항을 모두 포괄하는 초월 개념으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음영과 불분명한 부분들이 일괄적으로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만물은 다양한 단계에서, 밝은 것은 밝은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불분명한 것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물에 빛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사진과는 별개라고 생각되어졌다. 하지만 사진은 예술과 기계장치를 연계해서 그 둘을 모두 초월하는 가능성을 지닌 시선의 활동이며, 편재하는 현상들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포착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과 기술이 상호 보강하는 나선형으로 엮인다면 우리는 비로소 만물에 내재하는 빛이 발현하는 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도, 이미 가시의 빛과 불가시의 빛 안에서, 무효화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광명을 부여 받았다라는 대사의 말은 광명이 나중에 출현한다는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현재 가까  이 보이는 것처럼 현성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는 본래의 자성으로서 광명이 갖춰져 있다고 한 대사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광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광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광명은 사람이다. 광명을 가지는 것은 인간 존재 혹은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2

 

빛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궁극의 범신론적 신인동형론의 극치라고 불릴 수 있다. 혹은 유물론적이고 초월적인 리얼리즘 안에 잉태된 신비주의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빛은 만물에 깃들어 있고 사람은 곧 빛이다. 그렇다면 사진가-보는 자가 원하는 신체와 사진적 표현과의 거의 일체화는 전혀 사람 없는 풍경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권부문의 눈보라 치는 해변 사진이 그러하듯.

 

2 

권부문이 찍은 겨울 바다, 그것은 눈의 바다라고 하는 호칭이 어울리는 거친 날씨의 풍경이다. 눈은 언제나 어느 새인가 풍경을 흰색으로 덮고 잠재운다. 그러나 내려 쌓이는 눈은 단지 풍경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형상을 감싸고 있는 기존의 의미의 덮개를 걷어낸다. 때로 바람에 실린 눈은 풍경을 거칠게 어지럽히지만, 그것도 같은 결과를 낳는다 할 수 있다. 눈은 풍경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이 사진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던 잃어버린 빛을 되돌리기 위한 치유로서의 사진이다. 복구로서의 눈이며 파도이다. 눈과 파도는 모두 희다. 이 해경-설경이 죽음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풍경을 치유하기 위하여 일시적인 가사상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 보이는 수평선과 해변의 경계는 화면을 분할하는 두 개의 선이며, 수직 프레임의 하반부는 눈의 영역이다. 절대적 여백으로 바뀐 눈 덮인 해변은 관객의 신체 앞에 드러나며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 의 역할을 한다. 바다의 영역은 하늘과 육지 사이의 중간에 끼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유로운 파도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그 위에는 사선으로 때리는 눈발이 해면과 해변에 꽂히고 있다. 관객에게로 육박하는 파도 마루와 화면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지우는 무수한 긴 선의 눈발은 부동의 백색 해변의 무대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관객 앞에 똑바로 제시된다. 해변은 무대라고 해도, 지극히 반연극적이다. 그것은 결코 불특정 다수의 보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그런 스펙타클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마련된 무대인 것 같다. 나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를 위한 사진인 것이다. 수직의 화면, 그리고 화면 아래 쪽의 절대적으로 비어있는 무대사진가-보는 자가 바로 이순간 절대적인 구역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마주함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관객측에 있는 무대는 열려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거울인 것이다. 나는 풍경으로서의 나를 마주 본다. 무섭고 고독한 거울이다. 유일한 거울이 거기에 있다. 풍경은 하나, 나도 하나, 그 외에는 없다. 아무 것도 이 풍경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구도 나를 대신하거나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낙산> 연작은, 도원대사가 말한 자기 광명과의 만남의 장, 그 증명사진인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지속되는 삶을 걸고, 용기와 각오를 얻기 위하여 벌거숭이인 채로 그냥 바라 본다. 어떤 함의도 없이 혹은 모든 함의를 안고서.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도움은 오직 빛으로 나타난다. 이 사진들을 보면, 나를 무심히 내버려 두거나, 그냥 빨려 들어가거나 간에. 나 자신이 풍경 속에 전면적으로 투입되기 위한 장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어렴풋하지만 격한 순백에 인도되는 것같이.

 

생각해보면 권부문의 다른 연작 도 수직의 프레임 안에 하부를 구름의 구역, 상부를 푸른 하늘 구역으로 나눈 미니멀한 풍경사진이었다. 지상에 붙어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저항하는 것 같이 마주 바라본 구름 위의 풍경이었으며, 조심성 없이 운명에 함몰되어 있는 지상의 우리들의 위치를 거침없이 드러낸 작품이었다.

 

<낙산>은 아주 멀리 일본을 마주한 한국 동북부 해안의 지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객이 어디에 있더라도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를 성찰하고 자신과의 만남을 조직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장소이다. 혹은 그것은 가 그랬던 것처럼 보편적인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장소이다. 그리고 보는 자의 자만심을 고독하게 진정시킴에 있어서 늘 단 하나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이 장소밖에 없다. 여기 밖에 있을 곳은 없다. 하지만 어떠한 소유와도 무관하게 나는 그것을 본다. 나는 여기에 있다.

 

시노 쿠라이시 (평론가, 메이지대학 교수)

 

(번역: 오소자)

 

 

 

1. 도원(道元)정법안장/正法眼蔵 1(이시교지(石井恭二)주역), 가와데쇼보신사(河出書房新社) 출판, 쿄토, 1996382-383

2. 상기서,385-386

3. 쿠르베의 해경에 있어서 화가-보는자 회화와 거의 신체적 합일을 갈망하고 있음을 논한 마이클 프리드 참조.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쿠르베의 사실주의/ Courbet's Realism, 시카고대학 출판, 시카고,런던, 1990, 21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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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海、光

 - 倉石信乃

 

1 

 いまは昔、禅に「現成」(げんじょう)という言葉があった。目の前にそのままの姿で提示されていること、加工されることなく生(なま)のかたちで現れていることを言うのだが、写真の器械はその究極の理想においては、そうした虚飾なき無垢の現れ、すなわち「現成」を写し取る道具であるべきであった。しかし実際に写真がしてきたことは、「現成」が仮象・虚仮にすぎないばかりか、極めてしばしば、「ありのままのそれ」がたちまちに「それならざるもの」へと堕して虚構のうちに居直り、汚辱を重ねていくことの証拠をこそ提示したのであった。初源において写真はまさしく光の恩寵であったが、現在では光の浪費に耽っている。発明者の一人は写真を「光の言葉」と呼び、当時の人々も光によって物の痕跡が定着する神秘の箴言に耳を傾け、またそのプロセスを畏怖したものだった。いまや光の言葉は、そこそこに刺激的な視覚的な文様と宣伝効果を生み出すための、扱いやすい無意味なオノマトペであると見限られている。

 写真などより遙かに古く、人が心底から陽を崇め火を慕っていた頃よりずっと、光は、長く真理と善の譬喩でありつづけてきた。それ自体にすでに光が備わっていなければ、物も人も価値がないものと見なされた。光が離れることはただちに死を意味した。一方、闇の深さは、光の比喩が形骸化した時にこれを批判して、光から闇に至る比喩の階調を豊穣化する働きを成してきた。そんな比喩の働きの一切はすでに有効期限が過ぎてしまい、光も闇も、かつてそうであったところの己のパロディとして、ただ懐かしいばかりの真理と善の抜け殻を指さしている。

 写真は、いまも光の言葉でありうるか。そして光によるものの痕跡でありうるか。写真という媒体はあまりにも物理的に、ものを見るという行為がものの表面の反射する光を見ることに過ぎないというテーゼを自ずから証明してしまう。写真は表面の照り返ししか写さない。写真の中のものの輝きは、それ自身の輝きに非ず。他者の輝きの受容であり反射に過ぎない。それは徹底して表面的だ。そのように言い慣わされてきた。しかし時にはたとえば13世紀日本の禅僧・道元が、

 

《明々たる光明は森羅万象である、森羅万象の光明といえば、すべての草々の根といわず枝といわず葉といわず、花の光色も、花実の光色も、光明であるほかはない。地獄道・餓鬼道・畜生道・人間道・天に光明がある、修羅道に光明がある》(1)

 

と説くとき、私には、あたかも自然を写し取る写真の色の奥にも、不可視の光の宿りがあるかのように響いてくる。ここでは、写ることと写らないこと、見えることと見えないこととの切断は無きものと見なされている。道元の言う「光明」には、明証性の対立項をも含むような、メタ概念としての果てしない拡がりがある。陰翳と不分明な領分を、あまねく照らし出すというのではなしに、万物はみな、明るみは明るいまま、闇は闇のまま、不分明さもそのままの様態において、光を把持するのだ。万物に光が宿るという考え方は、写真から最も遠いように思われた。だがしかし、写真においてついに、機械と人為の連携によって両者をともに超出しうるまなざしの運動と、事象の遍在を掬い取る技術知の公正性・平等性が螺旋状に絡み合うならば、すべての事物には本来的に発光の契機がありえたはずだ、とわれわれはかろうじて語りはじめる。その時には、ものと人の境界も、もはや可視の光と不可視の光のなかで、無効化するだろう。

 

《ここに大師の云う、「人々の尽くに光明が具わっている」とは、光明が後に出現すると云っていない、昔からあったとはいっていない、いま傍らに観るように現成するとは云っていない。大師は「人々には本来の自性として光明が具わっているのだと、はっきり聞き取らねばならない。・・・「人々に尽く光明がある」と渾べての人は自づからに光明であると云うのだ。光明とは人々である。光明をもって、それは人の存在またその根拠であるとしているのだ。》(2)

 

光が人であるという見立ては、究極の汎神論的なアントロポモルフィズムと言える。それは物質主義的な超越、リアリズムがそれ自体として懐胎する神秘主義、と言い換えてもよい。万物に光が宿り、光は人である。そうならば、写真家=観者photographer-beholderの欲望する身体と、表現された写真との擬似的な交合が、全き無人の風景の中で繰り広げられるのも道理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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