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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캬트린 그루, “그 앞에서”, 2008
DATE : 08/23/2011 00:33

월간미술(2008.6)에  "소유할 수 없는 풍경의 호흡"이라는제목으로 발표.

 

그 앞에서

 

얼음, 한기. 아득히 먼 느낌, 빙하 계곡.

생명과 질료의 부단한 움직임. 북극해. 변화 중인 모든 형태의 물, 해변에 표류한 크고 작은 얼음 덩어리, 얼음 덩어리와 빙벽의 충돌, 파도와 구름, 바람에 따라 가볍게 휘날리며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눈.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대기와 대지, 그들의 혼합과 접촉, 나름대로 자라나고 있는 식물들. 

  

무제 #3369 (브레이다메르쿠르 해변-아이슬랜드), 2007.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다. 하늘은 얼음에 비치고, 얼음은 녹아서 파도에 실려온 바닷물에 섞이며 땅 속으로 스며든다. 검은 모래는 얼음 조각이나 돌과 뒤섞인다. 바다는 수평선으로 밀려가고 파도가 미처 쓸어가지 않은 눈이 군데 군데 남아있다.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이미지의 정적은 갖가지 소리로 채워진다. 물 녹는 소리, 부딪히는 소리, 웅얼거림, 더 크게 진동하는 소리들. 동시에 중력의 힘과 녹고 있는 얼음 조각의 무게와 변모가 느껴진다. 그리고 우주의 인력에 이끌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몰려가는 바다, 그를 따라 쓸려가고, 밀려오거나 파도 속에서 뒤집히는 얼음 덩어리들, 흐르고 지나가고 사라지며 순환하는 물과 공기의 움직임을 동시에 느낀다. 모든 것이 연관 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상의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더 이상 벽에 걸려있거나 책에 실린 이차원적인 이미지 앞의 관객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무제 (#12368), 오래피빙하-아이슬랜드, 2008.

갈라진 바위가 있다. 사이 공간에. 흙색, 눈밭에 만들어진 작은 섬 가운데, 하늘과 땅 사이, 구름과 눈 사이, 우리가 있는 곳과 저 너머 펼쳐진 산 사이를 연결하며 거기에 있다. 그 사이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한 구석에 있는 걸까? 우리도 두 요소 사이에 있는 걸까? 머리 위의 구름은 산 쪽으로 흘러가면서 그 앞에 서있는 우리를 하늘과 땅의 양극과 연결시킨다. 우리도 바위처럼 둘 사이에, 수직과 수평의 양 축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바위를 배경 앞에 놓인 돌출한 형태로 보지 않고 무게와 질감을 가진 공기에 감싸인 충만하고 고유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이 갈라진 바위는 단순히 앞에서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이 아닌 보다 넓은 시점을 열어 보이면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사진 이미지의 경험은 몸을 움직여 얻는 감각과 연관이 있으며, 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거나 기호를 알아보고 읽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 이상의 소실점을 가진 다양한 상호 작용들을 전체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시각의 여러가지 기능들, 망막 중심와 (fovea)의 아주 멀리 있는 미세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기능, 황반 (macula)의 판독 기능, 혹은 30도에서 180도 사이로 열려있어 움직임을 파악하는 주변시각과 관련된 기능들이 모두 요구된다. 다시 말하자면, 권부문은 빛의 움직임, 바위 덩어리, 넓은 평원, 바다 위에 드리운 구름, 해변의 폭설, 부유하는 빙하 등등, 그 무엇을 만났으며, 그것을 포착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남이라는 사건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현장에서는 이미지가 요구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자세가 된다. 그 과정이 곧 만남이다. 장소의 조건들이 대상을 잘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미지로 기록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내 앞에 펼쳐진 세계와 관계 맺는 가운데 얻어지는 총체적인 경험의 결론이다.  어떤 대상과 물리적, 정신적 차원에서 만난 것이 일순간에 한 장의 이미지로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늘 놀란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특정 상황의 선택이고 결론이다."

 

이처럼 "순간"은 "사진 찍는 나와 찍히는 대상, 그리고 사진 이미지 사이의 3자 관계"에 해당하는 "두께"를 가지고 있다. 이 "두께"는 이미지 속에서 움직임과 관련된 시간성으로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서,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밝기에 따라서 다른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 속에 담긴 것을 느낄 것이다.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작가는 능동적인 수동의 자세로, 목전의 현실과 현상에 열린 상태로 그 순간을 맞이하며, 그 가운데 사진을 찍는 행위는 묵상처럼 도래한다. 사진 찍기는 "사물이나 상황 앞에서 나의 존재방식을 기억하는 수단"이다. 소유보다는 존재의 문제이다. 만남과 수용, 다시 반복되지 않을 세계의 한 순간에 참여하기. 

 

여러 시기에 여러 장소에서 작업한 다양한 시리즈들을 아우르는 북풍경 시리즈는 세기가 바뀌던 시점에 떠난 시베리아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북방의 극한 상황을 만나고자 바이칼 호수까지 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솔제니친이 말한 "모든 말이 무의미해지는 언 땅"을 동경했다. 당시 나는 살을 에이는 바이칼의 칼바람에 나를 구역질 나게 하는 모든 것, 나 자신에 대한 불만까지도 끝장을 내고 싶었다".  서로 다른 여러 이미지들이 북풍경 시리즈를 만든다는 생각은 2008년 초에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1985년의 첫 장거리 비행 여행은 "인간도 새도 아닌 경이로운 새로운 시점의 경험"이었고 훗날 1993년 "온더크라우드"시리즈를 하게 된 동기였음을 기억해냈다. "고공에 떠서 전진하는 나의 위치를 정해주는 것은 바로 구름이었다. 구름이 만들어 내는 절대 수평선은 그것이 또한 완벽한 허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비행기 움직임이 나의 호흡이 되고 신체 언어가 만들어 내는 시각과 시점의 혼돈이 "온더크라우드" 시리즈의 작업 동기가 되었다." 여기서 이미 북풍경 시리즈의 특징 즉, 유동적인 시점과 기준의 변환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이미지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가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고 다양한 시리즈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작가가 단독 이미지나 유일 시점 대신 시간적 공존 속에서 이뤄지는 교류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시리즈는 작가가 세계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리고 가시적인 것이 끊임없이 변화할 때 가능하다. 2007년 9월 그린랜드의 캉기아 계곡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작품에서 우리의 시선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후 좌우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이미지를 섭렵하게 된다. 어떤 부분도 전체에서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다. 첫 만남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각 이미지들은 움직이는 전체의 일부, 뒤집히고 표류하고 뒤덮이며 변화하는 가운데 한 순간으로 보게 된다. 이미지 재현 프로세스에 기인한 부동성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적극적인 시각 속에서 움직임을 얻게 된다. 우주의 호흡에 따라서 율동하는 바다를 상징하는 고원(枯園)의 자갈밭과 암석들을 연상하게 된다. 전체는 무한한 백색조이고 거기에 드리워진 푸른 색과 어두운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고 뒤집히는 질료의 무게감을 전한다. 색조가 원근을 표시하며, 온더크라우드"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순서와 방식에 따라 고유의 시공간이 생겨난다

 

그 장소에 있는 것들과 요소들이 유동적인 것 못지 않게 작가도 움직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앞에서 시점을 찾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나도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고 몇 컷을 찍고 나면 상황에 맞는 호흡과 리듬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바다와 파도의 율동은 각별히 나를 사로잡는다. 추위와 바람 역시 장소의 특징적 요소가 된다."  이렇듯 풍경은 시각적이지 만은 않다. 그것은 작가 내면과 그를 둘러싼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열린 자세는 자신을 풍경의 일부라 생각하는데 기인한다. 일본 철학자 고바야시 야수오도 권부문과 유사하게 풍경을 해석한다. "풍경 속에서 우리는 풍경의 구성요소로서만 존재한다. 빛, 식물, 물, 공기, 돌... 그렇다, 우리는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호흡하는 존재로 거기에 있으며, 그 외의 다른 존재방식은 있을 수 없다. 물과 빛과 공기처럼 유동적으로 순환하는 존재..."

 

권부문의 풍경 해석은 기호나 사물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에 관한 것이다. "풍경은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소유될 수 없다"고 말하는 권부문이 인간을 비롯하여 집, 경작지, 길 등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요소들을 찍지 않는 것은 "순수한 원시 자연"을 특별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소유 개념의 거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풍경은 바람 속의 구름 같은 것으로 나의 마음 상태와 해석력에 따라서 나타나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인간과 그가 바라 보는 세상이나 이미지 간에 발생하는 교류란 유동적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온더클라우드"와 그린랜드 시리즈 중 놀라운 색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벽에 걸려있는 강렬한 청색은 우리가 그 푸른 깊이 속에 꼿꼿하게 서있을 것을 요구한다.  코발트블루의 얼음 덩어리들이 가볍고도 위압적으로 뒤엉켜 있다. 두 경우 모두 우리가 보고 있는 색깔이 실제인지 혹은 촬영과 프린트 작업에서 사진 기술이 만들어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사진이 재현인 이상 작가가 본 색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다. 작가 역시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의심을 했을 것이다. 이 푸른 색들은 대체 무엇인가? 특정 고도에서, 특정한 압력 하에서,  구성 인자들의 특정한 상태 속으로 빛이 관통할 때 질료가 스스로 드러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색을 어떻게 알아보나? 이 푸른 순간의 색을. 현상학자 마르크 리시르(Marc Richir)에 따르면 화가들은 사물과 색은 별 개의 것임을, 색이 사물 위에 칠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색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권부문이 찍은 대상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 우리는 고공의 하늘에 살 지 않으며, 그린랜드를 가 본 사람도 드물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인가? 아니면 색의 발현이 물질적이기 보다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인가?

 

롤랑 바르트(R.Barthes)가 말한 "이러 했었다"라는 기억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의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불특정 시공간의 다차원성, 그리고 비 소유에 대한 권부문의 관심은 열린 상태에서 세계와 관계 맺기라 할 수 있는 그의 작업이 자아와 세계를 구분하지 않고, 타자를 제외시키지도 않는 공존의 관계라는 것을 알려 준다. 그가 말하는 "사진적 호흡"이란 한 공간 안에서 대상과 자신의 상호 방향성과 거리로 규정되는 공간적 관계임과 동시에 공간이 곧 시간이 되는 시간적 관계이다. 일본 심리학자 기무라 빈의 말을 빌면 "현재란 나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공간, 풍부하고 광활한 현실로서 자아가 의식되는 공간이다." 공존의 광활한 장소. 거기에서 작가의 존재 방식은 당연히 열려있다. "나의 작업에서 사람의 자리는 이미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섰던 그 자리, 바로 이미지 앞이다. 그 자리는 거기 서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자리이다." 권부문의 작품은 관객 스스로 현재에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광활함을 경험하도록 하며 타인을 포용한다.    

 

캬트린 그루 (풍경미학자, 프랑스 릴 국립건축대학 교수) 

(번역 : 김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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