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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김애령, “권부문의 <돌에게>”, 2007
DATE : 08/23/2011 00:19

<Boomoon - To the Stones>, 나비장책, 2007

 

권부문의 <돌에게>

 

"명징성, 명징성, 명징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 죠지 오펜

 

<돌에게>는 여행길에 우연히 마주친 돌의 초상이다. 대부분 인적 없는 장소에 있는,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도 지나쳐 버릴 이름 없는 돌이다. 그런 돌이 화면 한가운데 놓여 광활한 장소의 주인이 되었다. 주변을 제압하는 주인공이기 보다는 자기가 놓인 장소의 내력을 비밀처럼 품고 거기에 있다. 권부문은 대상에 어떤 행위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태를 전한다. 이를 위하여 그의 탁월한 기술이 동원되었다.

 

"있는 그대로"는 결코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대상의 선택과 상상력, 기술적 노하우와 치열한 접근이 요구되는 창작이다.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목전의 대상을 "상대"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진면목의 발견이다. <돌에게>라는 제목은 돌이 대상일뿐 아니라 상대임을 의미한다. 

 

권부문의 <돌에게>가 주는 감동은 이미지 앞의 누구나가 작가가 섰던 그 자리에 다시 서게 되는, 사물을 사물 그대로 제시하는 예술에 있으며, 사물에 대한 인식이 곧 보는 사람 자신에 대한 인식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데 기인한다. 진면목이란 어느 경우에나 경외심과 반성을 동반한다.  

 

메세지는 이미지를 위장한다는 생각에서 특정 의미의 환기조차 경계해온 작가가 돌을 주제 삼은 것은 뜻밖이다. 자연 돌에 대한 종교적 미학적 시각을 가꿔온  동양 문화에서 돌은 문화의 일부가 된 자연의 상징이고, 문학적 후광을 두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돌의 미는 영원한 생명의 미"라고 어느 시인이 단언했듯이, 역사 이전부터 돌과 바위는 자연의 정기(精氣)로서 숭배되었고, "구름의 뿌리 (雲根)"라 불리며 수백년 동안 회화의 고상한 소재가 되었다. 또한 돌에 대한 관조와 예찬의 한 형태로 수석(水石)이 있다.

 

돌을 주시하는 권부문에게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전무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의 돌 이미지는 어떤 문화적 해석 이전에 마치 바로 앞에 놓인 것 같이 돌의 질감과 온도와 습기를 느끼게 한다. 광물학자나 지질학자가 아니더라도 주의 깊은 시각은 돌을 통하여 기후, 생태, 시간, 풍경을 만드는 이치를 헤아릴 수 있으리라. 권부문의 <돌에게>는 부동의 견고함을 상징하는 돌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작업들, 특히 , , 연작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시각적 명징성 외에 다른 의미를 추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든 의미의 가능성에 열린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부문의 돌에 대한 시각은 전통적 문화적 관점과 구별된다. 

 

돌은 기억이다. 그 견고함에 우주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견고함 위에 인간이 역사를 기록해 왔다. 그래서 돌 앞에서는 시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계곡의 급류가 다듬어 놓은 돌의 형태를 산에서 구한 다른 돌에 조각하며 강물의 무심한 에너지를 조각 작업의 원형으로 삼았던 쥬세페 페노네는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액체라고 했다. "모든 물질이 액체이다. 돌도 액체이다. 산조차 차츰 무너져서 모래가 된다.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짧은 기간을 사는 인간의 기준에서 어떤 것은 단단하다, 어떤 것은 부드럽다고 말할 뿐이다."  죠지 브렉트는 뮌스터 시내의 한 공원에 있는 자연 돌에다 "VOID"라 새겼다 : . 자연의 불투명성, 미지성을 상쇄하는 주문과도 같은 네 글자이기도 하지만, 기록의 공허함과 아울러 견고한 암석도 결국 무화(無化)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작품이었다. 속도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시간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돌의 시간이다.

 

권부문의 <돌에게>는 작가가 열렬히 바라본 돌들의 초상이자 그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돌들은 제각각의 표정으로 자연의 시간을 말한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되는 순간까지도 확고한 순리의 시간을 따르고 있는 돌에는 꾸밈이 없다.  이미지의 명징성만큼이나 돌의 목소리는 투명하다. 작가는 침묵하고 이미지가 발언한다.  

 

권부문은 도덕주의, 낭만주의, 상징주의를 거부하고 목전의 세계를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새롭게 시를 쓰려고 했던 영미 모더니즘 시인들과 일맥 상통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이미지즘, 그리고 그들의 객관성을 "진정성의 원칙"으로 삼은 미국의 오브젝티비즘은 "눈(眼)의 시인"들의 운동이었다. 작가가 종종 언급하는 프랑시스 퐁쥬도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이기를 거부하고, 일상적인 사물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언어를  발명하는 것을 시인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너무 친숙하여 새롭게 볼 수도 말할 수 없는 사물들을 과학자적 관찰과 상상력으로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 정의했다.

 

사진은 객관적 묘사를 위해 발명된 기술이며, 사진 이미지는 사물과 등식을 이룬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날, 표현 매체로서 사진의 투명한 언어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것은, 그 효과를 이용하는 것과는 달리  "눈의 시인들" 못지 않은 진정성에 대한 갈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객관성이 명징성을 획득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된다. 시보다 삶이 우선임을 실천해 보인 죠지 오펜의 말처럼. 

 

김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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